갈라디아서 4장 6,7절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예수님을 믿어 종이 아닌 아들이 되었다. 아들이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 여기서 유업이란 무엇일까? 유업이라 함은 아버지가 하는 일을 물려 받는 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하시고 계신 사업을 생각해 보았다. 예수님을 통한 인류 구원의 사업을 하고 계신다. 그럼 나도 이 일에 참여를 해야한다. 그저 사람들이 구원 받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을 내가 이어받는다 라고 생각하니 하나님의 절실함이 좀 와닿는 것 같다.
갈라디아서 4장 8,9절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은 바라보는 가치관의 차이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든 초점이 세상 사는 것, 세상 사는 동안에 맞추어져 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육신이 죽고 난 후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 이 점이 안믿는 사람에게는 답답하게 보이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썪어 없어질 세상것에 종노릇 하며 살아가던 습관이 남아 있어 예수님을 믿어도 여전히 썪어 없어질 세상것에 종노릇 하기가 쉽다. 잠깐 의식을 하지 않고 있다보면 나는 자연스럽게 세상에 종노릇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아브라함은 갈라디아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들었을까? 내가 느끼기에 바울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강하게 들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내가 만약 바울의 입장이었더라면 화가 났을 것이다. 신앙이 좋았던 이들이 갑자기 예전 처럼 돌아갔으니 답답하고 싫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 어떻게 하여 주면 좋을까를 가장 먼저 생각했다. 나는 남자라 죽기 전까지 해산하는 수고를 알지 못하겠지만 해산하는 것 같이 힘들다는 것을 바울이 표현해 주었다. 임신 기간이 하루 이틀이 아니듯 변화될 것 같지 않은 사람이라도 인내로써 계속 신경 써 주도록 해야겠다.
갈라디아서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구절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길로 빠져 들었는지 모른다. 하늘이 어머니가 계시다면서 이 어머니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저 이 구절만이 아닌 앞뒤 구저을 보았을 때 사라과 하갈의 비교내용일 뿐이다. 표현을 좀 어렵게 해서 그렇지 우리 어머니라 지칭된 사람은 사라인 것이다. 뭐 성경에도 써져 있듯이 많은 적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난다고 했으니 어쩔 수 없는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