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6장 2절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아그립바 왕이 이 재판장에 온 이유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위가 있는 유대인들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이다. 이만큼 관심이 집중된 재판도 없을 것이다. 바울의 간증을 아그립바 왕이 들음으로 회개하여 영접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전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시도를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아그립바 왕은 결국 바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인 것이고 전하는 사람으로는 전했다는 사실로 끝인 것이다. 로마서 1장 14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A란 사람이 B에게 만원을 갚아야 한다. A가 나에게 만원을 주면서 부탁을 한다. B에게 만원 갚을 것이 있는데 전해달라는 것이다. A는 B에게 이제 빚진 것이 없고 내가 B에게 만원 빚진 것이 된다.
사도행전 26장 9절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바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대적했던 판단은 '스스로'한 것이다.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고 에수님을 만남으로 삶의 목적은 바뀌게 되었다. 살면서 작고 소소한 결정을 해야하는 일들은 많다. 하지만 삶의 목적을 결정하라 때에는 말씀에 근거해서 응답받은 것이 있어야 할 줄로 생각한다.
사도행전 26장 14절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채의 쓰임새를 찾아보니 '가축을 앞으로 몰기위한 끝이 뾰족한 막대기'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바울에게 '이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다.' 라고 하셨다. 가시채를 휘두르는 사람은 하나님이고 바울은 동물로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시채를 이용해 앞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바울은 뒷발질로 그 가시채를 차고 있는 것이다. 조금 무서운 말이다. '내 뜻을 거역해 봐야 니만 손해다.' 맞는 말인데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것을 모르니깐 깨닫기 전까지는 계속 가시채를 찰 것이 아닌가?
사도행전 26장 29절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바울과 같은 수준으로 성정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냥 지구에다가 천국을 건설해도 될 것 같다는 웃긴 결론이 나왔다. ^-^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하나님의 깨어짐 학교에 입학해 성장함으로 쓰임받기에 합당하게 성장한다. 이런 사람들을 제쳐두고 바울은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였다. 바울과 같은 수준이라면 충분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바울은 개인 구원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였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고 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요한복음 9장 25절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 이니이다."
개인 간증은 내가 증거하는 것이다. 내 삶을 통해 증거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이 이것을 믿을지 말지는 중요치 않다. 증인으로서의 역할만은 하면 되는 것이다.